제5강 세례의 중요성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받음, <사도행전8>, 제5강 세례의 중요성, 125쪽

“바울 선생의 제3차 여행, 대개 주후 54년에 저 윗고을 갈라디아와 부르기아 지방을 다녀서 소아시아의 서남쪽에 있는 항구 도시로서 대도시인 에베소에 이르렀더니 예수님의 제자로 자칭하고 자임하고 있는 사람이 열두엇쯤 있었는데 그 사람들의 생활 행동을 가만히 볼 때에 진실하지 못하거나 훌륭하지 못한 것을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은혜의 계약 가운데 들어가서 사는 사람의 생활 방향과 인격적인 장성의 확연한 증거를 볼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가장 요체(要諦)가 되는 문제는 새로운 은혜의 계약의 시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사실, 예수님이 약속하신 보혜사이신 성신님이 역사(役事)하시는 문제입니다.” 要諦 : 중요한 점. 요약할 요. 살필, 진실 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에 관문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 앞에 자기 자신의 신앙고백도 되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하는 것이 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대해서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확인을 하시는 중요한 절차입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성례이고 그중에서도 세례입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과 은혜의 계약 가운데 접붙여진 여부를 가장 간단하고 명확하게 획선적(劃線的)으로, 금을 긋는 식으로 알려고 할 때에는 ‘무슨 세례를 받았는가? 세례 받은 의미는 무엇인가?’ 하고 묻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을 접붙여 주는 그 신앙의 대상은 누구냐 하면 메시야다. 요한이 자기 뒤에 오시는 메시야, 즉 그리스도에게 접붙여 준 것입니다.” “에베소를 하나의 기점(基點)으로 해서 발전해 나갈 교회의 초석(礎石)으로서 활동하게 하기 위하여, 교회의 기둥같이 활동하게 하기 위해서 처음에 나온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은혜를 주시고 뽑아내시는가 하는 양태(樣態)를 보여 주셨습니다.” 礎 : 주춧돌 초 “다 같이 예루살렘의 최초의 신약 교회를 회억(回憶)하면서, 보혜사이신 성신님의 내재(內在)와 활동을 믿고 의지하고 나아갔을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위험 <사도행전8>, 제5강 세례의 중요성, 128쪽

“사도 바울 선생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3차에 걸쳐서 여행을 하면서 교회를 세웠다는 것은 기독교 역사의 최초에 성신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은혜계약과 새로운 경륜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증시하면서 역사를 지어 나가는 최초의 중요한 개시(開始)인 것입니다. (중략) 이때에 신령하고 아주 현실적이면서 능력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땅 위에서, 지금 이 역사의 시기에 어떤 형태를 취하고 현현(顯現)하느냐 하는 문제를 증시하기 시작한 때라는 것입니다.” 顯 나타날 현, 現 나타날 현. “요한의 세례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은 이미 지난 주일에 이야기했습니다. (중략) 그 근원을 보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온 것이지 사람이 제 마음대로 이렇게 하기로 작정한 것은 아닙니다. 요한의 세례도 그렇고 물론 그리스도의 세례도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양식(樣式)도 다른 것을 취한 것이 아니고 물을 가지고 하는 세례입니다.” “요소적인 중요한 문제는 첫째로 (중략) 근본적으로 그 심정(heart)에 아주 극단적이고 전적인 변화가 있은 다음에야 준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그와 동시에 이 세례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사죄(赦罪)라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중략) 요한이 증거한 자기 뒤에 오시는 메시야에 대한 관념을 정당하게 갖고 신의(信依)하고 나아갔다면 요한의 세례만으로도 성례를 통과한 것입니다. (중략) 충만한 기독론적인 의미를 다 계시하지 아니한 그런 양태의 세례에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험 속에 이 열두 사람들도 빠져 들어갔던 것입니다.” 赦용서할 사.

세례의 중요성 <사도행전8>, 제5강 세례의 중요성, 129쪽

“그 위험이 무엇이었는지 이제 우리가 생각해 보겠는데, 먼저 세례의 중요성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이 말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중략) 가톨릭에서는 소위 뱁티즈멀 그레이스(baptismal grace)라는 말을 써서 세례는 그것 자체가 그것을 시행했으면 그에게 은혜를 끼치는 부호(符號)가 되는 동시에 은혜를 끼치는 방법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중략) 그 사람이 충분한 기독론과 복음 사실에 대한 넉넉한 인식이 비교적 희박하다고 할지라도 세례 받은 그 사실이 그 사람에게 은혜로 역사하면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충분히 은혜의 방도(media gratiae)라고 이야기합니다.” “루터교에서는 세례라든지 성찬이라든지 하는 성례가, 츠빙글리식으로 ‘하나의 완전한 기호에 불과하다. (중략)’ 하고 생각지 않고, 그것을 시행하는 그 시간과 그 공간에 예수님께서도 임재하셔서 거기서 그것이 상징하는 모든 은혜를 그 시간에 그에게 다 베풀어 주신다고 말합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에 상당히 공간적이라고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가톨릭 쪽은 물리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나 성찬을 베풂으로 그것이 직접 동인(動因)이 되어서 거기서 어떤 유효성이 발생한다고 한다면 물리적인 이야기입니다. 인과(因果)의 관계를 가진 물리 이야기입니다.” “그 물질 자체도 심지어 어떤 신비한 의미를 띠게 되는 것같이 이야기합니다. 또한 츠빙글리의 말대로 하자면 ‘(중략) 우리는 주를 기념하는 것이고 하나의 의식을 집행해서 그것으로 금을 그어 불신자와 신자의 세계를 나누고 그가 신자의 세계로 들어왔다는 것, 즉 그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명확하게 확인하는 일이다’ 하는 정도에서 끝내기 쉽습니다.” “하지만 개혁 교회가 전통적으로 믿고 또 성경이 우리에게 정당하게 가르친 도리로서 가장 중요하고 엄숙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세례는 그것 자체가 하나의 기호 혹은 징표이고 동시에 하나의 봉인, 즉 확인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한 기호와 확인이냐? 요약해서 말하면 그 사람이 하나님이 은혜의 계약에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와 접붙임을 받아서 그로 말미암아 죄 사함과 중생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하나의 징표를 준다. 그것을 네가 확증으로 가지고 있거라’ 하는 의미입니다. 그와 동시에 내 편에서는 ‘이제부터는 이 새로운 생명으로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인생의 길을 걸어가야지 옛사람으로서 걸어가서는 안 되겠다. 그런고로 새로운 사람으로 걸어가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전부를 드립니다’ 하는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확인인 동시에 내 쪽의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8:19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의 이름으로 모든 백성을 제자를 삼아서 세례를 베풀라”고, 마지막에 대사명(The Great Commission)을 내리실 때 그렇게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무릇 어떤 사람이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서는 죽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그 경영하신 대로, 선택하신 대로 성신님으로 역사해서 새로운 생명을 넣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중생(重生)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넣어 주신 사실이 그 사람의 의식 가운데 나타나는 사역을 성신님께서 하시면, 이것을 가리켜서 변개(conversion)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변개의 사실에는 첫째로 회개라는 사실이 따라옵니다. (중략) 거기서부터 획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의 참된 회개는 일생에 한 번뿐입니다.”

회개라는 말의 의미 <사도행전8>, 제5강 세례의 중요성, 132쪽

“그런데 성경에서는 회개라는 말이 정확하게 이런 의미로만 쓰이지는 않고 (중략) 어떤 경고가 이르고 책망이 있고 말씀이 그에게 오면 ‘아, 이거 잘못했구나’ 하고 깨닫기도 합니다. (중략)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재미있는 설교를 듣고 좋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러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때를 말합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종교도 하려고 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도 섬기려고 하고 ‘하나님은 나를 요구하실 것이다’ 하는 주제넘은 생각도 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무가치한 자신을 가치 있는 것같이 인정하는 일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깊이 느끼는 시간이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 참 잘못했다’ 하고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회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하면서도 아주 저급하고 비천한 위치에서 자식다운 아무런 인격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가 비로소 정신을 차려서 자기를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자신을 가치 있는 것같이 인정하는 일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깊이 느끼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적인 품성, 즉 그리스도적인 도덕적 성격과 인격이라는 것을 모르고 밤낮 몇 가지의 도덕적 조건에 비추어서 ‘이것은 괜찮다. 이것은 잘못했다’ 하는 정도에서 웃고 울고 자만하고 구안(苟安)에 빠져 있다면 기독교의 바른 도리를 체득하지 못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생활 지침은 ‘오직 성신을 의지해서 새사람으로 살아라’ 하는 데에 있지 옛사람적인 여러 가지 것을 가지고 개과천선(改過遷善)을 해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 苟 구차할 구. 遷 옮길 천. 오직 성신을 의지해서 새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자기의 잘못을 생각해 봐야 생각 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판하는 표준(criteria)이 그것뿐이기 때문입니다.” “큰 의미를 안 가지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가리켜서 ‘임시적 회개’라고 하는데 이런 임시적 회개도 겉으로 보기에는 진짜로 회개하는 것과 여러 가지로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세례는 근본적인 회개를 전제로 함 <사도행전8>, 제5강 세례의 중요성, 135쪽

“참된 의미의 회개와 완전한 변개 안에는 또 한 가지, 신앙의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중략) 참으로 구원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회개에도 적어도 자기가 먼저 바르게 판단하는 인식론의 요소, 즉 지적인 요소가 있어야 하고 그다음에는 정적(情的)인 요소, 그다음에는 무엇보다도 강력하게 의지적인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회개가 성립됩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줄 때에 요구한 회개는 그런 임시적인 회개가 아니고 근본적인 회개입니다. (중략)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으로서 자기를 드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법칙에 의해서 바르게 살겠다는 자기의 작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생활 도리와 그 경영하시는 여러 가지 것들을 차례차례 배워서 그것에 의해서 자기가 살아가고 그것에 따라서 사명도 행하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한 분자로서 자기의 본분도 행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 ‘너는 과연 하나님께서 죄 사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셨고 또한 네게는 은혜의 계약의 세계로 그 거룩한 나라로 옮겼다’ 하는 것을 확증해 주시기 위해서 세례라는 의식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행함과 동시에 자기 자신은 이미 그에 대한 확실한 인식과 확신이 있어야 하고 그 확신은 확실한 증거를 함께 가지고 다녀야 하는 것입니다. (중략) 이 새로운 사람으로서 행보를 한다는 것은 성자(聖者)의 생활을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새로운 사람이 자꾸 장성해 가는 것이니까 자기가 아는 범위 안에서 아장아장 걸어가는 것입니다.” “세례는 심히 중요하고 그것은 또한 은혜의 방도로서도 중요합니다. 그 시간에 그 복음적 사실과 자기의 구원과 중생과 사죄의 큰 사실들을 확인하고 하나님께서 ‘오냐. 내가 네게 그렇게 했다’ 하고 세례라는 표를 주셨으니까 그 표를 잡으면 이제 확실하고 요지부동할 것입니다. 이런 확실하고 요지부동하는 심정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성신께서 역사하셔서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정도의 반대만 하지 않고 받으면 성신께서 꼭 역사해 준다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루터파에서 생각하는 것인데, 말하자면 마치 성경 말씀에다 하나님의 성신의 능력과 역사를 가둬 놓는 것과 같은 생각입니다.” “성경 말씀이 가장 유효한 은혜의 방도라고 할지라도 성신께서 그것을 쓰시려면 쓰시는 것이고 만일 안 쓰시면 소용이 없습니다. 성례도 마찬가지이고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신님께서 주권을 가지고 임재하시고 역사하시기도 하고 또 그 사람을 보시고 안 하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성신님께서 주권을 가지고 임재하시고 역사하옵소서.

말씀이 없는 성례는 의미가 없음 <사도행전8>, 제5강 세례의 중요성, 137쪽

“성례에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상징하는 진리의 내용입니다. (중략) 반드시 말씀과 병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략) 개혁 교회에서 명확하고 확호하게 주장하고 믿는 바는 말씀은 성례 없이 독립하지만 성례는 말씀 없이 독립해서 의미를 안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가 가지고 있는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예리하게 전파하는 요한의 설교에 있었던 것입니다. (중략) 말씀이 먼저 들어가면 그 마음이 찔려서 자복하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하고 나와서 묻고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세례가 가지고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중략) 메시야에게 속한 사람으로 자임하고 있으면서도 자기 안에 깨달음이 없다는 큰 결핍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아무리 공급되어도 그것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할 때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결핍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를 믿는 양 생각합니다. (중략) 우리들도 그런 문제에 대해서 민감하게 자기를 반성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공급될 때 그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하옵소서. “세례가 요구하는 바 믿어야 할 내용을 충분히 다 깨닫지 못했으면서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이러한 위험이 뒤따라 다닙니다.”

절차나 의식 자체가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님 <사도행전8>, 제5강 세례의 중요성, 139쪽

“‘나는 그러니까 세례 받았다. 나는 메시야에게 접붙임 받은 사람이다’ 하고 그런 구안(苟安)에 빠지고 그 세례가 주는 실효를, 세례가 요구하는 실제 내용으로 가지고 있는 효과를 가져야겠다고 생각도 하지 않고 과연 그것이 자기에게 있는가를 검토도 하지 않고 있으면 부지불식간에 그것은 효과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런 까닭에 효과 없는 세계에서 일보도 벗어남이 없이 주저앉아서 저회하고 있다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평연(平然)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손을 씻었다고 해서 오며가며 남을 미워했다든지 남을 중상모략 했다든지 자기 자신이 남에 대해서 그릇되게 생각하고 오만한 평을 했다든지 하는 것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물며 팔 뒤꿈치까지 씻어서 결례를 행했다고 해서 그것이 정(淨)해지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 일에 대해서 맹렬히 타매하셨습니다. ‘안 씻은 손으로 무엇을 먹어서 사람이 불결하게 되는 것인 줄 아느냐? 불결한 것은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참조. 마 15:19-20)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성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성경을 대할 때에도 성경 책 자체에서 신성한 무엇을 발견하려고 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 ‘책은 거룩하다’ 하고 책을 우상화합니다. 책이 뭐 거룩합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책을 혼동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경 숭배라는 것도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그릇된 메시야관 <사도행전8>, 제5강 세례의 중요성, 141쪽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유일의 구속자이심을 믿었고 구속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믿은 사람들입니다. (중략) 유대교의 성현(聖賢)이라는 사람들이 배출되던 시대입니다. 제1세기 2세기에 난 사람들을 탄나임(תַּנָּים)이라고 그러는데 아주 권위 있는 유대교의 성현들입니다. (중략) 그 당시에 가지고 있던 메시야관을 안 고치는 이상에는 메시야를 대속의 구속주로, 자기의 피로 구속하시는 분으로 믿을 수 없습니다. 메시야의 구속을 믿지 않고서 메시야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면 그 세례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로고스가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셔서 세상에서 사람으로 살고 계시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고 속죄의 크신 사실을 이뤘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구원을 받을 길은 없습니다.” “메시야를 보편적인(universal) 구주로 믿고 나와야만 요한의 세례가 성례로서의 효과를 갖고 은혜의 방도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고, 하나님과 자신이 은혜의 계약을 맺었다는 표(sign)가 되고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중략) 만일 바울 선생이 가서 예수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받도록 하지 아니 했다면 에베소에 모여 있던 열두 사람은 언제까지나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 그냥 있었을 것입니다.”

세례로써 확증되는 사실들 <사도행전8>, 제5강 세례의 중요성, 142쪽

“어떤 사람이 성례 후에도 성례의 효과가 없는 상태가 그대로 계속된다면 이것은 그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중략) 가장 근본적인 문제, 즉 죽음에서 나와 생명으로 들어가고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에 기호와 표가 되는 것이고 확증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구원받았는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구원받았다는 확실한 징표를 주고 이제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인간적으로 물리적으로 확실하게 공표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가 이후에는 자기의 육신의 생활도 그 약속(commitment)하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각오도 그런 사실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세례를 정당하게 받은 사람은 비록 복음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미흡하다고 할지라도 세례 받으려고 자기의 입으로 신앙을 고백했을 때에는 최소한 성삼위와 그 성삼위 중 제2위 아들이신 하나님과 그의 구원 사실에 대해서 승인한 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후일에 그의 신앙이 타락했다가 다시 복구된다고 하더라도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요한의 세례를 받았던 이 사람들에게 있는 위험은 그것을 전연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왜 다시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하면 첫째로 세례는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의 확인이 되는 까닭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구원받았다는 사실의 확인이 될 만한 내용과 요소를 안 가지고 있으면서 전연 별다른 기독론하에서 요한의 세례를 받은 까닭에 그 효과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어떤 교단에서 별다른 기독론을 가르치고 그런 별다른 기독론하에서 세례를 받았다면 그것은 효과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다시 세례를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비록 그의 지식이 미흡하더라도 성삼위의 이름 아래에서 아들이신 하나님의 구속의 사실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받았다면 이쪽 교회에 와서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삶으로 왔다는 표로서 일생에 한 번 정당한 세례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아야 함 <사도행전8>, 제5강 세례의 중요성, 145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는 새로운 하나님의 경륜의 시대가 전개되고 진행되었다는 것입니다. (중략) 예수 이름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확인해 놓은 것입니다.” “민중을 결속시키고 조직해서 힘을 기르고 고난을 참으면서 로마와 투쟁을 해서 나중에는 로마 제국을 무찔러 버린다는 그런 의미의 구속(救贖)은 알아도 그런 물리적이고 육체적이고 현세적인 것 말고 영원한 하나님의 크신 경륜의 구속의 사실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사상과 신앙과 지식의 내용이 충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을 때에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세례가 구원을 받았다는, 구원에 관계되었다는 아무런 증거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저의 사상과 신앙과 지식의 내용이 충분하게 하옵소서.

기도 <사도행전8>, 제5강 세례의 중요성, 146쪽

“거룩하신 주님, 저희들의 신앙생활 가운데 주께서 저희를 위하여 베풀어 주신 은혜의 사실이 있지만 거기에 대한 저희의 신앙의 내용과 인식의 내용은 심히 부족하고 미흡하고 결핍투성이이며, (중략) 인간적인 종교관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저회하고 비천한 가운데 그냥 속해 있을 때가 많이 있사오며 사시랏ㅇ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이해한 것같이 자기 스스로 자득(自得)하고 구안(苟安) 가운데 젖어 있는 일이 많이 있사옵니다.” “오늘날에도 명색만 기독교인이고 기독교를 자기가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 진수(眞髓)와 오묘한 도리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결핍이 없는 양으로 그대로 지내는 이 큰 암매, 멍청한 사실이 흔히 있기 쉽사오니 저희를 정신 차리게 하시고 깨우쳐 주시고 불쌍히 여기사 저희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결핍이 무엇인지 알게 하여 주시고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 내는 종교와 자홀(自惚) 가운데 빠져서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양 생각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것으로서 쓰일 수 있는 양 생각하는 이런 모든 오만과 잘못을 완전히 포기하게 하시고 주님 앞에서 겸손히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늘 바라고 기다리며, 주님이 깨우쳐 주시는 사실을 보면서 너무나 잘못이 많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하시옵소서.” * 髓 골수 수. 惚 황홀할 홀.

1980년 10월 26일 주일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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