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강 요한의 세례 (2)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 <사도행전8>, 제4강 요한의 세례 (2), 97쪽

“너희가 믿을 때에 성신을 받았느냐. (중략)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왜 다른 것은 안 묻고 ‘믿을 때에 성신을 받았느냐?’ 하고 물었겠는가” “항상 모든 일에 하나님의 그 거룩한 계시와 그 은혜 가운데 살려고 하기보다 자기 선입관이나 생각이 앞서서 자기의 뜻대로 살면 성신께서 특별히 이런 것을 조명하셔서 깨닫게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갈구하지도 않는데 그런 것이 들어가서 특별한 의미가 거기 그 사람에게 진개(陳開)될 이유가 없습니다.” 陳 : 늘어놓을 진. 항상 모든 일에 하나님의 그 거룩한 계시와 그 은혜 가운데 살게 하사 성신께서 특별히 조명하시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사실상 두 개의 큰 문제 앞에서 어떤 확호한 결단을 내려야 할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런 크라이시스(crisis)에 서 있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전통적인 관념이나 생각은 무엇이고 그에 따른 그 사람들의 태도는 어떤 것인가, 메시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이었는가를 보면서 요한이나 우리 주 예수께서 그 사람들에게 준 것인 무엇인가 하면 최종적으로 세례입니다. 요한의 세례, 예수님의 세례라는 한 개의 중요한 실(seal) 혹은 사인(sign)으로 나타났습니다. (중략) 그러한 사인으로서의 의미를 가져야만 비로소 성례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결례(潔禮)라는 것이나 제사를 드린다는 것도 하나의 사인입니다. (중략) 물을 뿌리든지 손을 씻든지 이것도 하나의 사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이 조금이라도 죄를 씻는 데에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물을 가지고 씻을 수 있는 죄는 세상에 없습니다.” seal : 증표. 潔 : 몸 닦을 결. “이런 징표로서 세례가 대표하는 실(實)내용이 무엇이냐 (중략)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주었다는 의미를 바르게 생각하지 않으면 여기서 큰 착오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 實 : 열매 실 “두 가지 착오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세례라는 것은 몇 번이든지 필요에 따라서 다시 고쳐서 받고 또 받아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마치 침례교회에서 ‘침례가 아니라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무효다’ 하는 것과 같이 세례의 징표라는 점을 무시해 버리고 양태(mode)를 더 중요히 생각하는 이런 일이 발생하기 쉽습니다. 둘째로, 만일 그것이 무엇인지 바르게 생각지 아니하면 세례가 가지고 있는 성례로서의 중요한 의미를 바르게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톨릭처럼 ‘요한의 세례는 결국 성례의 의미를 갖지 않으므로 세례에 수반하는 독특한 은혜가 거기에 없다’ 하는 주장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현실적으로 무슨 영향이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요컨대 참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사상을 종합적으로 좀 더 풍부하게 가지는 데서 그 사람의 사상 생활이 풍부해지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어떠한 권선징악적인 적용을 금방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같이 생각한다면 모든 지식과 모든 탐구 역시 의미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지식을 얻고 탐구하고, 참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사상을 종합적으로 좀 더 풍부하게 가지게 하옵소서. “평생을 가도 하나님 나라의 그 거룩한 도리는 깊이 알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도리를 깊이 아는 것이 그 사람의 바른 정신과 또 인격을 함양해서 세워 주는 소이(所以)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도리를 깊이 알아 바른 정신과 인격을 함양해서 세워 나가게 하옵소서. “그것 자체로 충분히 효과를 내고 성례로서의 의미를 다 가진다면 왜 에베소에 있는 열두 사람은 다시 세례를 받았는가”

구약의 성례와 신약의 성례 <사도행전8>, 제4강 요한의 세례 (2), 101쪽

“성례라는 것이 무엇인가 (중략) ‘세례를 받고 너희 죄를 씻으라’ 하였는데 이 말씀에서 중요히 생각할 것은 이것이 소위 성례적 표현(sacramental language)이라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아서 죄를 씻을 수 있습니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표이고 실질상 효과와 능력은 내부에서 성신님이 일으키시는 것이다. 그래서 네 죄를 씻어 주신다’ 하는 의미입니다. (중략) 성신님이 그 안에서 역사하셨다는 역력한 증거가 있는 까닭에 이것을 행함으로써 첫째는 보이는 교회 안에 정식 회원으로서 입회를 하는 표를 삼고 둘째는 그 사람이 충분히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표적으로 그에게 실시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뿐입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신앙고백으로만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 죄를 씻었다는 것을 믿고 의지합니다’ 할 때 ‘아, 그렇습니까’ 하고 받는 것입니다. 설령 그 사람이 거짓말을 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지 그 사람이 거짓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검색까지는 않습니다. 교회는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중략) 창세기 17:10에도 있습니다. 거기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할례라는 것이 마치 계약인 것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성례는 유월절과 할례 두 가지이고 신약의 성례는 세례와 성찬입니다. (중략) 구약의 유월절과 할례라는 예전(禮典)은 개인적인 것보다 국민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략)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민족적인 색채가 아닙니다. 민족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인인가 아닌가만 남는 것입니다.” “둘째로 구약의 이 예전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거기에 여러 가지 다른 것을 수반(隨伴)시켜서, 곁들여서 상징적으로 의식을 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즉 제사나 결례도 다 구약의 성례를 보조하는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중략) 그런데 신약은 어떠냐 하면 성찬이 없으면 세례가 완전히 성립 안 된다든지 또 세례가 없이는 성찬이 완전히 성립되지 않는다든지 하는 일이 없습니다. (중략) 셋째로 구약의 성례전들이 장차 오실 예수님을 표현하고 있고 신약에 나타나는 성례들은 이미 오셔서 일을 이루신 예수님의 사실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 隨伴 : 따를 수, 짝 반. “넷째로 (중략) 지배하시는 방법은 개조(個條)를 하나씩 하나씩 들어 놓고 이 개조에 대해서 어떤 조건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소위 구약의 배타주의(particularism)라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세례나 성찬을 집행했을 때 내리시는 그 종합적이고 전체적인 중생과 새로운 생명의 활동과 또 새사람의 일과 성신님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온전히 신령한 생활을 경영할 수 있게 특권을 내리시는 이런 풍성한 은혜와 같은 은혜를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중략) 그러나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 의지할 때에는 그런 모든 것이 다 종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서에 나타나 있는 성례 <사도행전8>, 제4강 요한의 세례 (2), 104쪽

“성례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우리의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7장 1절에 나타난 것을 보면 (중략) 정식으로 모든 사람 앞에 ‘이 사람은 교인이다’ 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집행을 안 했으면 교인인지 아닌지 아직 불분명한 것입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한 상이점(相異點)을 거기에 두는 것입니다. 또한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서 엄숙하게 약속하고 그리스도에게 봉사하고 살고 네 마음대로 네 행복을 추구하고 살지 말라는 엄숙한 예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주께 헌신하는 예식입니다.” 내 마음대로 내 행복을 추구하며 살지 않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서 그리스도에게 봉사하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혜의 계약의 복리들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어떤 징표로서, 세례를 받으면 느낄 수 있고 성찬을 먹으면 먹음으로써 느낄 수 있는 그런 징표로서 신자들에게 표시되고 그것이 확인되고 봉인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내리고자 적용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중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8장은 세례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 알고자 하니까 이것을 보는 것인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란 무엇이냐?” “이것은 교회에 입교하는 예식으로서 중요하고 은혜 계약의 표도 되고,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졌다는 것과 중생했다는 표도 되고, 죄의 사유함을 받았다는 표도 되고, ‘나는 이제 하나님 앞에 전부를 다 드렸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으로 이제부터는 행보하겠습니다’ 하는 내 고백의 표도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가지고 있는 독특성 <사도행전8>, 제4강 요한의 세례 (2), 106쪽

“성례가 요한의 이름으로 베풀어진 것은 어떤가? (중략) 학자들이 뭐라고 하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고, 우리의 믿는 바와 성경이 가르친 바에 의해서 교회가 역사적으로 늘 믿고 나온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개종자들에게 주던 세례와는 달리 아주 풍성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요한의 세례도 그와 같이 죄 있는 사람의 죄를 씻어서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선택함을 받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그 위치에 다시 놓아 준다는 의미인가? (중략) 결례는 분명히 복귀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략) 보통 유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위치와는 전혀 다른 아주 새롭고 높은 차원의 위치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의 사례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 새로운 차원은 무엇입니까? (중략) 박두(迫頭)해 온 하나님 나라를 위해 확실한 준비를 하라는 자리입니다. (중략) ‘준비하기 위해서 이 세례를 받아라’ 하는 의미로 준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의 세례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미입니다.” * 迫 : 닥칠 박. “그것 자체 안에 철두철미하게 도덕적인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네 심정을 온전히 정화했다는 도덕적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성례는 ‘말씀’이 없으면 의미가 없음 <사도행전8>, 제4강 요한의 세례 (2), 108쪽

“요한의 세례에 서 있는 첫째 조건은 ‘네가 만일 근본적으로 네 마음에 성신님으로 말미암은 회개를 하지 않았다면 내가 이 세례를 네게 줄 수 없다’ 하는 것입니다. (중략) 신약의 세례에 중요하게 붙어 다니는 큰 요소, 그것이 없으면 세례의 효과가 없게 되는데 그 요소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그것은 ‘말씀’입니다. 성례는 말씀이 없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말씀은 독립해서 의미를 갖지만 성례는 상징에 불과한 까닭에 말씀이 같이 가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성례를 받으면서 그 예식이라는 부호(symbol) 혹은 그 표(sign)에서 그 말씀을 연상하고 말씀이 약속한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유대 사람들이 결국 의식 그 자체가 효과를 내는 것같이 생각했습니다. (중략) 말씀에 대한 아무런 인식과 회억(回憶)이 없을지라도 의식 자체가 효과를 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톨릭의 세례관입니다. (중략) 세례를 주었다는 사실이 그에게 큰 은혜를 끼쳐서 그가 홀연히 여러 가지 은혜 가운데 변화를 하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回憶 : 돌아올 회, 생각할 억. “제사 자체가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 까닭에 ‘양보다는 황소가 더 좋다’ 해서 큰 소를 드렸습니다.” “교회가 그것이 없으면 교회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요소가 뭐냐 하면 말씀이 그 교회 안에 내려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강단(講壇)이 있어야 합니다. (중략) 개혁 교회에서 교회라는 것을 말할 때에는 말씀이 정당하게 바르게 선포되고, 선포만 되는 것이 아니라 강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입니다.” “요한의 세례의 특징 중 하나가 그것입니다. 말씀이 붙어 다녔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그 선두 조건으로 말씀이 오는데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heart) 가운데에서 성신님으로 역사해서 영혼의 저 심저(心底)에서부터 죄를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갈구와 신앙이 없이는 세례를 안 준다’ 하는 것이 중요한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목표였고 궁극적으로 세례를 주는 목적이 그것이었습니다.” 底 : 바닥 저 “그뿐 아니라 요한이 거기다가 무엇을 늘 보했는가 하면 예리하게 아주 마음을 확실히 꼬집고 찌르는 듯한 설교를 계속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말씀의 능력이 역사하고 있는가 <사도행전8>, 제4강 요한의 세례 (2), 111쪽

“마치 우리 교회가 오래전부터 개혁 교회로, 죽 개혁 교회의 노선과 정신에 확실히 서 있었던 것같이 남들이 말하는 소리를 더러 들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서울에 있을 때에도 그런 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반성해 보면 그런 것이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얼마나 개혁 교회의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중략)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그것을 지시했다는 확증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하는 줄 압니까? 내가 무엇이기에 내가 나가서 이런저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므로 자기를 반성해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하라고 하시는지 아닌지 먼저 잘 알아보아야 합니다. 이런 것이 중요하지, 덮어놓고 ‘자기를 써서 이 일을 하시라’고 하면서 목사도 되려고 하고 종교인도 되려고 하고 교회도 세우고 다 합니다. 그렇게 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자신을 반성하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줄을 알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잘 알아보게 하옵소서.

요한의 세례는 예수님의 세례와 본질상 동일함 <사도행전8>, 제4강 요한의 세례 (2), 113쪽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세례는 어떠냐 할 때 가톨릭은 ‘이것은 결코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중략) 고대에 있던 신학자들은 이 두 가지가 본질상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냉정하게 보면 그것은 본질상 같은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셨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둘째로 그 양식이 물로써 세례를 준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그리고 셋째로 가자 중요한 것은 그에게 아주 극단적이고도 근본적인 변화, 전적(全的)인 변화가 없이는 세례 안 준다는 점입니다.” “누가복음 1:5-17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있는데 그 가운데 16절을 보면 주의 사자가 요한의 부친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요한이 태어날 것을 이야기하면서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의 하나님께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하고 말했습니다.” “자기가 가고 있던 길에서 방향을 돌려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입니다.”“그 다음에 17절을 보면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돌아오게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중략) 자식들 가운데 많은 사람을 자기네 선조의 마음으로 돌이킨다는 것입니다. 선조가 가지고 있던 그 마음을 자식들에게 돌아오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고 저희 마음대로 저희 세대의 정신만 가지고 살던 그 사람들에게 이제는 바른 정신이 돌아오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이 근본적인 회개입니다.” “누가복음 3:7-9을 보면, 이것은 마태복음 3:7-10에도 있은 말씀인데 (중략) 임박한 진노에서 피할 수 있는 길이 이러한 참된 회개인데 ‘누가 이것을 가르쳐서 이제는 행복을 추구하고 환난을 피하려고 이렇게 나오느냐’ 하고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행복주의(eudaemonism)와 종교적인 이익 추구에 대해서 맹렬하게 공격한 것입니다.” “근본의 변화, 마음(heart)의 변화를 전제로 하고 말한 것이지 그러한 변화가 없는데 그 조목만 하면 산다고 이야기한 것은 아닙니다.”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세례는 성례적인 의미를 가지고 죄를 씻는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죄를 씻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그 표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는 네 죄를 씻는다’ 하는 의미, 즉 사죄(赦罪)를 위한 성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볼로같이 그 세례를 받고 그 성례적인 의미를 나중에 깨달으면, 그것을 깨닫기만 한다면 반드시 예수의 이름으로 또 세례를 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예수님의 세례와 다른 점 <사도행전8>, 제4강 요한의 세례 (2), 117쪽

“첫째로 요한의 세례는 구약의 이코노미하에 속해 있어서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실 일을 늘 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율법 시대에 속해 있어서 회개의 필요를 강조했습니다. 변개(變改, conversion)는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 소극적인 것은 회개고 적극적인 것은 전적인 신앙, 즉 구원의 신앙입니다. 지금 신약 시대에 와서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일이 첫째로 오지 않고 믿으라는 말을 하는데 ‘네가 마음이 고쳐지고 전부가 변개되어서 주를 믿어야겠다’ 하는 것입니다. (중략) 셋째로, 이 세례는 주로 유대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이 가지고 있는 소위 보편주의(universalism)와는 다른 점입니다. 그러면 어떤 점에서 다르냐? 앞으로 자세한 설명을 더 듣게 되겠지만 우선 중요한 것은 이런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죄를 비춰 볼 때에 무엇에 비춰 보느냐 하면 율법에 의해서 합니다. (중략) 신약의 유니버설리즘이라는 것은, 형식상으로는 보편주의이고 내부에 있어서는 신령주의(Spiritualism)입니다. ‘사람의 육신이 연약해서 이룰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의 성신께서 하신다. 이렇게 해서 자연스럽게 율법의 제도를 이루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율법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그 하나하나의 강요에 대해서는 이제 우리는 상관이 없다.’ 이것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의 한 부분입니다. (중략) 그리스도적인 새 생명으로 말미암은 새사람이 자연스럽게 건강하게 살아나가면 자연스럽게 그 성격이 하나님의 거룩한 그리스도의 품성에 맞게 되어 있습니다. 새사람은 그리스도적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만 살았느니라’는 그리스도 안의 새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고 ‘얼마나 잘못이 많고 부족이 많은가? 지금은 몰라서 못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항상 자기 자신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성신님이 내려오셔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충만한 가운데 역사하셔서 생명의 성신의 법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고 하는 이 사실은 모르고 구약적인 율법의 개조에 의해서 회개를 한다고 해서 그놈 하나에 대해서만 어떻게 하면 되는 줄 알고 이렇게 껍데기만 피상적으로 형성해 나가는 이것이 부정당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가톨릭이 그렇습니다.” “수많은 프로테스탄트 역시 그렇게 하고 사는 것입니다. (중략)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신령한가? 내 안에서 성격이나 성품 전체가 조화 있고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와 같이 되어서 율법에 맞는가? 성품이 율법에 맞으면 자연히 행하는 것도 어떤 개조를 알아서 행하는 것보다는 율법이 요구하는 그 근본정신에 의해서 하게 될 것입니다.” 성신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충만한 가운데 역사하셔서 성격이나 성품 전체가 조화 있고 자연스럽게 율법이 요구하는 그 근본정신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기도 <사도행전8>, 제4강 요한의 세례 (2), 121쪽

“거룩하신 주님이여, 저희들 마음 가운데 빛을 비추셔서 얼마나 저희가 부족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도리를 제대로 잘 알지도 못하고 스스로 된 체하고 자기의 몇 가지의 도덕적인 조건으로 자기의 종교와 강령을 삼고 그 동굴 속에 갇혀 앉아서 그것을 우상화하고 다른 사람을 그 자리에서 관견(管見)하며 비판하고 폄론(貶論)하고, 하나님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부정당한 모든 일을 행하면서 그것조차 알지 못하는 이런 괴악한 위치에 있는지 알게 하시옵소서. 자기가 무슨 가치가 있는 것같이 생각해서 스스로 하나님 앞에 원조(援助)를 하려고 나서는 아주 망측하고 주제넘은 생각도 하는 일이 있사옵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게 하시고 겸손히 처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신성한 일에 대해서 자기가 함부로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주께서 저희에게 분수에 맞도록 은혜를 주셨고 일을 시키셨으니 그 시키시는 일에 충실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 管 : 대롱 관. 貶 : 떨어뜨릴 폄. 援 : 당길 원

1980년 10월 19일 주일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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