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강 요한의 세례 (1)
하나님 말씀 가운데 숨어 있는 중요한 문제들, <사도행전8>, 제3강 요한의 세례 (1), 72쪽
“그러면 이런 구절을 읽어 갈 때에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하는 것과 문제가 되는 것을 볼 눈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오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중요성을 따질 때에 ‘그것이 얼마만큼 현실적인가, 즉 얼마만큼 적용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합니다. 보통은 ‘하나님 나라의 전체의 큰 진리 가운데에서 이것이 얼마나 막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할 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전체 사상 구조라든지 또 하나님의 큰 경륜의 내용에 대해서 우리가 다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매일의 실천 생활에서 얼마만큼 도움이 되겠는가’ 하는 것을 얼른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항상 ‘내게 얼마만큼 유익하냐?’ 하고 공리적으로 생각하는 방식, 즉 공리적인 사고 형태를 못 버리는 것입니다.” 공리적인 사고 형태를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전체의 큰 진리 가운데에서 파악하고 하나님의 큰 경륜의 내용을 하나하나 알아가게 하옵소서.
신약과 구약의 관계 <사도행전8>, 제3강 요한의 세례 (1), 73쪽
“오늘 이야기 가운데 우리가 볼 문제점이 무엇인가 하면, (중략)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를 또 받았다는 것이 여기 나타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요한의 세례는 그리스도인이 될 때 아무런 효과도 없고 관련이 없는 것인가? (중략)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요한의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착실히 깨닫는 것이 옳지, 몰라도 그냥 지레짐작만 하고 지나간다면 중요한 진리를 놓치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깊은 도리를 깨달을 재주가 없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며 착실히 깨달아 중요한 진리를 놓치지 않게 하시고, 깊은 도리를 깨닫게 하옵소서. “새로운 하나님의 배제(配劑)와 경륜하에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기 전에 있었던 일이라면 그것은 후에 새로운 배제인 신약의 시대에 들어와서 어떤 비중을 가지는가” * 配劑 : 여러 가지 약제를 배합함. 또는 그 약제. 짝 지어 줄 배, 배합할 제. 排布(배포). 늘어설 배, 펼 포. 생각을 해서 일을 이리저리 조리 있게 계획(計劃)함, 또는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계획(計劃). dispense [dispéns] : 조제하다, 특면하다, 내놓다 “온전히 이루어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고 할 때에는 구약과 신약을 합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의미가 무엇인가 (중략) 구약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사실, 또한 우리에게 적용되는 진리이며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거의 모르고 지낸다면, 신약은 얼마나 잘 아는지 몰라도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사상을 제대로 소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거스틴 선생이 (중략) ‘신약은 구약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고’, 그러니까 신약에 있는 진리들은 다 구약 안에 있는 것이고 ‘신약은 결국 구약을 설명해 주는 책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중략) 가장 강조해준 책이 구약 이사야입니다. 신약 어떠한 책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신약을 바르게 깨달아 알고자 한다면 그 모태가 되는 큰 사실인 구약의 여러 가지 내용들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지식도 이렇게 바르게 배워야지 순서 없이 신약만 붙들고 앉아 있으면서 무엇을 아는 것같이 생각하는 그것이 큰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지식을 순서대로 바르게 배우게 하옵소서.
구약의 배타주의와 신약의 보편주의 <사도행전8>, 제3강 요한의 세례 (1), 75쪽
“구약이나 구이코노미 시대가 가지고 있는 배타주의(particularism)는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 교회 안에 들어와서 누리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성격인 보편성(universalism)과 확실히 대조되는 것입니다. (중략) 의식법은 만일 법으로 따지면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데에 필요한 절차법입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사람과 사람끼리 ‘너는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라’ 하는 여러 가지 가르침들은 실체법입니다.” “더 깊은 지식을 얻은 까닭에 변동되었다는 것보다는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전에는 ‘못 쓰겠다’ 하던 것도 ‘할 수 없다. 그냥 그대로 용인해야지’ 하고 전에 일호(一毫)도 용납하지 않던 것을 용납하는 식으로 대개 많이 변합니다.” “신령한 주의(spiritualism, spirituality)라고 할 수 있는 것을 근거로 비추어 보자면 구약적인 철저한 자기 규제에도 못 미치고 신약이 주는 바 거룩한 성신으로 말미암은 은사의 생활에도 이르지 못하는, 중도 소도 못 되는 반거충이와 같은 상태인 것입니다. 대개 크리스천들이 이런 중간 지대에서, 회색 지대에서 그냥 구안(苟安) 가운데 빠져서 안일하게 지내기가 참 쉽습니다.” * 중도 소도 아니다 : ‘스님과 속세인도 아니다’의 뜻인데, 속인(俗人)을 소[牛]로 이해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苟安 : 구차할 구. 구차하게 편안과 안위를 구하는 것. 이것도 저것도 아닌 회색 지대에서 돌아다니기가 심히 쉽사오니, 주께서 저희를 불쌍히 여기사 거룩한 성신으로 말미암은 은사의 생활에 이르게 하옵소서. “회색 지대의 구안 (중략) 참으로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런 특색도 없고 아무것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그런 불분명한 도덕적인 상태에 대해 철저한 자기반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에 능력 있는 교회가 서려면 <사도행전8>, 제3강 요한의 세례 (1), 77쪽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철저히 받고 거룩한 교회를 형성하려면 철저한 정신과 신앙의 위치에 서야지, 저렇게 중도소도 못 되고 어리삥삥하게 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터키 땅인데 그 일대를 놓고 보면 바울 선생의 생각에는 마치 고린도가 아가야의 중심이 되고 그다음에는 세계로 뻗어 나가기 위해서는 로마가 또 하나의 중심을 이루어 나가듯이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에베소가 중요한 중심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에서 전도를 해 보았으니까 갈라디아 땅에 있는 어느 곳을 생각해 보았을는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경과해 온 더베나 루스드라를 보았을 때 여기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중략) 에베소에 능력 있는 착실한 교회가 서려면 구원의 의식이 분명하고 성신의 거룩한 능력이 충만해서 그 충만한 능력 가운데서 교회의 기초를 세워 나갈 만하고 교회 역사의 처음을 장식해 나갈 만한 그런 핵심(core)이 될 중요한 인물들이 거기 있어야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 사람들 머리 위에 손을 얹으니까 그 사람들에게 옛날 한 24-5년 전에 임했던 오순절의 특별한 성신의 역사가 임했습니다. 그것은 처음에 신약 교회를 개시하기 위해서 필요한 성신님의 은사를 베풀어 주신다는 한 표호(標號)였습니다. 방언을 한다든지 예언을 한다는 것 자체가 큰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 표호를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제일 알아보기 쉬운 표호는 과거에 있었던 일이 또 한 번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인(sign)으로, 시작하는 호각 소리 같은 표호로 그 사람들도 방언도 하고 예언을 한 것입니다.” * 標號 : 표할 표, 이름 호. 속의 것을 나타내 보이는 표지나 부호.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했던 이유 <사도행전8>, 제3강 요한의 세례 (1), 80쪽
“우리의 그릇된 생각이나 등한한 생각이나 특별히 어떤 문제점도 생각지 못하고 그냥 멍하니 지나가는 이런 정신 상태에서 벗어나서 똑똑하게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늘 마음에 두고 생각할 수 있고 어떤 문제점이 있으면 생리적으로 얼른 마음에 걸리게끔 되어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중략) 우리는 흥미 때문에 배우는 것은 아니고 중요한 문제니까 그냥 넘어가지 않고 조금이라도 알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그릇된 생각이나 등한한 생각이나 특별히 어떤 문제점도 생각지 못하고 그냥 멍하니 지나가는 이런 정신 상태에서 벗어나서 똑똑하게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늘 마음에 두고 생각할 수 있고 어떤 문제점이 있으면 생리적으로 얼른 마음에 걸리게끔 되어 있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그러면 ‘요한의 세례는 무효했던 것이냐’ 하는 것이 첫째 문제입니다.” “여기 있는 열두어 사람은 완전히 결핍이 되어 있기에 다시 세례를 받고 정신을 차리게 하나님께서 은혜로써 회복해 주신 것입니다.” “세례 문제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과연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이름을 들을 만한 사람인가’ 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요소가 완전히 결핍되어 있는데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조건들은 가지고 있으려니 하고 자홀(自惚) 가운데, 스스로 만족 가운데 빠져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깊이 바르게 알아야 함 <사도행전8>, 제3강 요한의 세례 (1), 82쪽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그분에 대해서 얼마만큼 알고 있었고 어떻게 알고 뭐라고 가르쳐 주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야 그러한 정치 제도니까 일방 정치가들은 가서 악질적으로 짜 가지고 오고 국민들은 먹고 좋다고 감사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그것을 안 먹고 거부하고 자기는 아프리카 사람이나 인도 사람같이 그냥 쪼들리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느냐 하면 그럴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맹목적으로 멍하니 있지 말고 국가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저버리고 나가면 나중에 어디로 갈 것인가를 근심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생각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생각을 하게 하옵소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 측이 어느 때는 노동자들의 근로나 고통이나 여러 가지 것들을 이용해서 자본을 축적했는데도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 뽐내고 자기 마음대로 쓰면서 낯을 내고 그것을 영광으로 알고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자본주의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일에 자유를 주고 또 그런 일에 구애(拘碍)가 없도록 한다는 점 때문에 악질적이고 악마주의적인 공산주의 같은 것을 대항할 때에는 이쪽에 서서 대항할 수밖에 없지만,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과 잘못에 대해서 그냥 용인하고 나가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 낯내다 [난내다] (활용형: 낯을 내다) 다른 사람 앞에 당당히 나서거나 지나치게 자랑하다. 拘碍 : 거리낄 구, 거리낄 애. 礙(거리낄 애)를 쓰기도 함. 거리끼거나 얽매임. 하나님 앞에서 좋은 태도를 가지게 하옵소서. “그 교회의 강단이 그리스도를 얼마만큼 깊이 바르게 가르쳤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이 됩니다.”
세례 요한이 증거한 그리스도 <사도행전8>, 제3강 요한의 세례 (1), 84쪽
“프로테스탄트의 우리 교회가 사람을 받아들이는데 그 사람이 가톨릭에서 기독교 세례를 받고 왔다고 하면 ‘당신이 받은 영세(領洗)는 무효니까 다시 받으시오’ 하지 않는 것입니다.” * 領 : 다스릴, 옷깃, 목, 가장 요긴한 곳. 영세 : 세례하는 일 “요한은 예수님을 어떻게 알았느냐 (중략) ‘내 뒤에 오시는 분’이라고 해서 자기는 그의 안내자라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당신이 능력이 있는 분이므로 많은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하고 이야기 했습니다. 바로 이어서 ‘그분은 성신과 불로써 세례를 주실 분이다. (중략) 그는 심판자이시다.’” “대속(代贖)의 고통을 받으실 분 (중략) 선재(先在)하신 분이고, 31절에는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세례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는 목적은 그분을 이스라엘에게 소개하고 나타내려는 것입니다. (중략) 성신으로써 세례를 주실 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증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심히 중요한 선언인데 (중략) 그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요한의 세례를 받으면서 요한이 소개하는 예수님을 알 때에 나사렛에서 오신 그분을 이스라엘에 약속한 메시야로서 그 메시야 개념의 테두리 안에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의 전통적인 신관(神觀)에 의하면 하나님 외에 다른 아무도 하나님과 동등으로 여길 수가 없습니다. (중략) 전통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일반적인 신관이나 구원관에 아무런 수정을 가하지 않았던 까닭에 그들은 요한이 부르짖는 회개라는 문제와 죄악에 대한 예리한 지적 때문에 찔림을 받고 나와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전통적인 메시야관의 문제점 <사도행전8>, 제3강 요한의 세례 (1), 88쪽
“요한은 이와 같이 사실상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사람이 알아야 할 정당한 기독론의 핵심을 뽑아서 말했지만 사람들은 편견(prejudice)이 있는 까닭에 그렇게 못 알아들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자세한 해석과 개념을 새로 구성하지 않는 이상,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는 말뜻과는 전연 같지 않습니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사도행전8>, 제3강 요한의 세례 (1), 89쪽
“전통적인 메시야관에 따르면 메시야가 구주로서 임한다는 생각은 전연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구주는 하나님뿐이시고 구속은 하나님으로만 말미암는다. 어떠한 중보자(中保者)도 필요하지 않다’ 하는 강한 신관과 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무엇을 믿느냐,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독론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의 중보자(mediator, μεσίτες)이시라는 것입니다.” 保 : 도울 보. μεσίτης, ου, ὁ : 메시테스[mĕsitēs]. 중재자. “중보자로서의 그의 임무를 제사라는 형식을 가지고 생각하고 표현하자면 그는 첫째로 제사장인 까닭에 당신의 몸을 제물로 삼아서 하늘에 있는 성막(聖幕)에 들어가서 단번에 모든 죄를 도말(塗抹)하기 위한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렸다는 것입니다. (중략) 영원한 멜기세덱의 반열(班列)을 좇는 제사장으로서, 아론의 반열과 같이 중간에 변동하거나 하지 않는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둘째로, 그는 선지자로서 우리를 늘 가르치시고 셋째로, 왕으로서 우리 위에 군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塗抹 : 칠할 도, 칠할 말. 발라서 드러나지 않게 가림. 班 : 나눌 반. “지금은 하늘에 그저 구주로 앉아 계신다는 정도의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전통적으로 프로테스탄트의 신앙 중에서도 확연히 깊은 신학과 신앙을 가지고 가르친 이 개혁 교회의 신앙에서는 절대로 그것을 용인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보자로서 제사장인 동시에 왕이시고 왕인 동시에 선지자이시고 선지자인 동시에 제사장이십니다. 그것을 다 지금도 행사하고 계시고 그 어느 것도 조금 적게 일하시는 부분이 없습니다. 다만 나라를 경영하시는 형태가 이렇게 생긴 것뿐입니다. (중략) 참으로 하나님의 통치의 기묘하신 방법, 예수님이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기묘한 방법은 무엇인가를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략) 그가 선지자로서 항상 성신님을 나에게 내주(內住)하게 하셨고 가르치게 하시며 그 거룩한 진리로 나에게 늘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을 못 믿는다면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요한의 세례 당시에 발생한 문제 <사도행전8>, 제3강 요한의 세례 (1), 91쪽
“이스라엘 사람들은 (중략) 그 죄를 속하려면 먼저 회개를 해야 하고 둘째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선행으로 맺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회개의 열매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주 유대적(Hebraistic)입니다.” “오늘날에도 유대교에서는 이사야 53장에 있는 고난 받는 메시야를 한 인물로 생각지 아니하고 유대 사람 전체로 봅니다. 그래서 옛날에 유대 사람들이 메시야 시대가 도래(到來)하기 위해서 자자영영(孜孜營營) 노력하고 고통을 참고 애를 쓰고 매를 맞고 피땀을 흘렸지만 그 노력이 씨가 되어서 그 후에 메시야 왕국과 메시야 시대가 도래한다고 하면 보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략) 이런 것들이 요한의 세례 당시에 필연코 발생했던 일이고 세례 받은 사람들 안에도 그런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 孜孜營營 : 힘쓸 자, 만들 영. 쉬지 아니하고 부지런히 일함. “그러면 요한의 세례 자체가 무효인가?”
기도 <사도행전8>, 제3강 요한의 세례 (1), 93쪽
“저희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회색 지대에서 돌아다니기가 심히 쉬우며 (중략)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그리스도의 도리의 심오하고 신령하고 거룩한 것들에 접촉하면서도 그 능력을 내 것으로 삼지 못하고 항상 영외에서 자기의 고집과 자기 마음대로의 선입관 가운데서 그냥 저회하고 있는 것들을 생각하게 되옵나이다. 주께서 저희를 불쌍히 여기사 크게 정신 차리고 깨우치게 하시고,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의 그 오묘(奧妙)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하시며 이리하여 교회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참된 은혜의 능력의 역사 가운데 확호하게 서게 하시고 인간적인 그릇된 도덕관이나 자기의 고집이나 자기의 편협한 종교관 가운데서 방황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1980년 10월 12일 주일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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