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강 수로보니게 여인의 신앙
이 사건이 일어난 정황 <신앙의 자태2>, 제4강 수로보니게 여인의 신앙 중 121쪽.
"공생애 3년 초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두로 지경으로 들어가셨다고 했는데, 거기는 전도를 하러 들어가신 것이 아니고 격렬한 생활 가운데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피곤하셔서 그것들을 잠깐 피하시고 거기서 잠시 쉬시려고 들어가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때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 하나가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그 여자를 히브리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 위하여 "가나안 여자"라고 했고, 마가복음에서는 그 여자를 "헬라인" 즉 '이방 여자'라 또 족속은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북쪽에는 헬라의 후계자로 수리아(Syria)가 있었는데, 그 수리아 판도 가운데 옛날의 페니키아(Phoenicia), 곧 베니게 일대를 시리아의 베니게 혹은 수로 베니게(Syro-Phoenicia)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수로 베니게 일대에 늘 살고 있던 사람들은 유대나 사마리아 사람들이 아니고, 옛날의 가나안 땅에 살던 사람이니까 가나안 족속 혹은 이방 족속입니다."
주님께서 칭찬하신 신앙에 대해 배우고 깨달아 신앙이 장성하도록 성신께서 인도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신 이유 <신앙의 자태2>, 제4강 수로보니게 여인의 신앙 중 123쪽.
예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신 이유는 신앙의 대상을 바로 알고 믿게 하시려고 하심입니다.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다윗의 자손이 아닙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유독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졌던 약속의 내용을 표시하는 것이다. 곧 다윗에게 언약하신 보좌와 관계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이스라엘에 국한하여 보내심을 받은 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너 이방 여자가 내 이름을 부를 때에는 내가 대답할 수 없다" 하는 의미로 말씀을 안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도록 성신께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여주시길 기도합니다.
다윗의 자손 <신앙의 자태2>, 제4강 수로보니게 여인의 신앙 중 124쪽.
다윗의 자손이 이스라엘 이외에는 전혀 상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신령한 의미의 이스라엘은 '다윗의 자손'과 관계를 맺습니다. "소위 이스라엘의 특권과 소망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신약 교회를 세우시는 시기까지 의미를 가졌지만, 일단 그리스도의 거룩한 은혜의 왕국이 신약의 교회라는 형태로 오순절 이래 역사 위에 확실히 그 자태를 나타내면서부터 이스라엘 사람들과 교회라는 것이 두 개의 하나님의 특정한 선택의 대상으로 병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다윗이 자손은 우리에게도 상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때 아직 이스라엘이 역사의 종국에 이르기까지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들에게 그 나라를 제시하시는 그 일을 끝마치시는 시간까지 다윗의 자손은 이스라엘과만 상관이 있고 이방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거룩하신 경영, 계획의 내용은 이스라엘 사람을 중심으로 한 거룩한 계시와 그 나라의 복음을 역사 위에 먼저 확립한 다음에, 그것을 기관으로 삼아서 만방에 퍼쳐 나갈 것으로 하신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어느 기간까지 한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는 이스라엘은 아직 이스라엘의 의의와 가치를 가지고 있던 때입니다.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유일신론의 의의, 이스라엘 역사 위에 유일신이 친히 통치하시는 나라를 건설하는 의의, 또 계시를 보존하는 의의나 거기서 메시야가 나와서 찬연히 세계에 빛을 비추고 세계에 모든 은혜를 전달하는 의의를 아직까지는 이스라엘이 보유하고 있는 시기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때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말이 수로보니게 사람에게는 아직 시간적으로 돌아오지 아니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경영되어 나가는지 성신께서 가르치시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바르게 깨닫고 살아가도록 인도하여주시길 기도합니다.
여인의 집요한 신앙 <신앙의 자태2>, 제4강 수로보니게 여인의 신앙 중 133쪽.
"우리는 예수님께 나왔다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나와서 자기가 이해한 한도에서 예수님의 인격에 매달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고로 결국 신앙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거룩하신 인격 혹은 품성에 자기가 매달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전체를 거기에다 내던지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매달렸을 때 예수께서 "아, 너 안 되겠다" 하시더라도, "안 되지만 저는 매달리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아니, 나는 지금 다른 데 줄 곳이 있어서 너한테는 줄 것이 없어" 하실 때에도, "그렇지만 부스러기라도 있지 않습니까?" 하고 이렇게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예수님이 가지신 관대와 자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하며, 예수님의 인격과 품성에 대해 좀 더 알아가며, 예수님의 거룩하신 인격에 자신의 전체를 내던지고 매달리도록 성신께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예리한 통찰력의 중요성 <신앙의 자태2>, 제4강 수로보니게 여인의 신앙 중 138쪽.
"먼저 자녀로 배불리 먹게 한다면 주여, 그 다음에는 저에게도 돌아올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것은 무엇이냐? 이 여인은 항상 예수님의 어떤 말씀, 평면의 절망적인 듯한 말씀 가운데서 소망을 발견하려고 하는 예리한 통찰력을 늘 행사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민감성, 이 점이 신앙에 참 중요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어떤 말씀에서 자기와의 관계를 늘 발견해 보려고 하는 간절한 태도, 다시 말하면 말씀을 정당하게 합리적으로 해석하고 통찰을 해서 저기서 자기와의 관계가 타당성 있게 성립하는 것을 늘 찾는 이 태도가 신앙을 일으키는 중요한 첫째 조건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요? 기대가 없는 곳에, 소망이 없는 곳에 신앙이라는 것이 발생 않는다고. 내가 무엇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기대할 수 있는 타당성 있는 계시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얻느냐 하면, 내게는 상관이 없는 것 같은 냉정한 말 가운데서라도 내가 기대할 수 있는 즉 나에게 관계 있는 타당성이 있는 결론을 얻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신앙이 효과 있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대할 수 있는 확실한 결론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정당하고 또 합리적인 추리에 의한 결론' 혹은 '해명(解明, 까닭이나 내용 따위를 풀어서 밝힘)에 의해서 얻은 진리'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정당한 해명에 의해서 얻어진 결론으로서의 진리가 자기에게 어떻게 해당되는가를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성경이 명문(明文, 글로 명백히 쓰여 있는 조문(條文))으로 선언한 것만을 찾고 있으면 안 됩니다. 성경 안에 나하고 직접 관계된 것으로 믿을 만한 것은 몇 가지 안 됩니다.
문자적이며 평면적이고 겉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정당하고 또 합리적인 추리로 바른 결론을 내리게 하시고, 민감하고 예리하게 통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명하여 진리에 이르게 하시며, 그 타당성에 의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며, 그로 인하여 믿음이 자라도록 성신께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성경 공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신앙의 자태2>, 제4강 수로보니게 여인의 신앙 중 141쪽.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때에도 성경의 어디에서든지 나와의 관계성을 찾되 도덕적인 교훈, 윤리적인 교훈에서만 관계를 찾지 말고, 거기서 나타나는 원칙이 나의 생애 가운데, 오늘날 이 인류 세계의 역사의 진전 가운데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깊이 통찰하는 기민성과 심오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만큼 장성하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것입니다. 만일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하면서 가만히 듣고 간곡한 마음으로 그 말씀에 대하여 주의 깊게 통찰하고 해석하는 기민성을 가지지 않았다면 예수님께 그러한 대답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네 믿음이 크도다" 하는 그러한 위치에 올라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기이하고 큰 믿음을 가지게 되느냐? 그러나 기이하고 큰 믿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말씀에 대한 통찰력이 깊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한 번만 보면 쑥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깊이 맛보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상고(嘗考, 맛볼 상, 자세히 살필 고)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상고의 예 1 :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와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는가? 상고의 예 2 : 구약의 많은 율법 조목들이 오늘날 나에게는 무슨 상관이 있는가?
말씀을 상고하여 바르게 해명한 목사님들을 통해, 말씀을 바로 깨닫고, 생애 가운데, 오늘날 이 인류 세계의 역사의 진전 가운데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깊이 통찰하는 기민성과 심오성을 가지도록 성신께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위대한 신앙 <신앙의 자태2>, 제4강 수로보니게 여인의 신앙 중 144쪽.
"부정적으로 나가는 그 표면을 보지 않고 그 안에 있는 희망을 포착해 낸 것입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신앙입니까? 이런 것이 위대한 신앙입니다. 이런 위대한 신앙을 씨로 하고, 그리고 일생의 목표에 대한 하나님의 확실하고 거룩한 결정과 나를 거기에다 쓰시겠다는 확실한 경륜의 표시를 믿는 그것을 날로 해가지고 내 신앙이라는 것이 성립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자태를 공부하면서 그동안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배웠습니다. 첫째, 신앙은 사람이 착하다든지 의롭다든지 도덕적으로 고결하다든지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하나님의 정하신 목표에 대해 각성하고 더욱더욱 장성하여 그 목표를 향해서 매일 전진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진할 때에는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전진해야 위대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백부장의 신앙과 수로보니게 여인의 신앙에서 발견하는 것으로서, 어떠한 부분부분적인 현실상의 문제를 놓고 신앙하느냐 않느냐, 즉 현실상의 문제를 놓고 주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신뢰의 결과를 받느냐, 아니면 신뢰하지 못하고 잃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현실상의 문제가 하나하나씩 풀려 가는 데서 한 걸음씩 전진하는 것입니다. 주신 목표를 향해서 내가 한 걸음 전진하려면 현실상의 문제가 내 앞에 제시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문제를 내가 신앙으로 통과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거기에서 신앙이 발휘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장애 없이 탄탄 대로를 그냥 달려가듯이 맥진해서, 마치 택시로 달리듯이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걸어가듯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애가 있으니까 가다가 헤엄쳐야 할 때도 있고 가다가 곡예사와 같이 아슬아슬한 데를 지나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목표에 대해 각성하고, 주신 목표를 향해 매일 현실적인 문제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을 신뢰하며 걸어가도록 성신께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신앙의 대상에 대한 바른 인식 <신앙의 자태2>, 제4강 수로보니게 여인의 신앙 중 145쪽.
"'그러면 자녀의 떡은 아닐지라도 자녀의 떡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또 있을 것이다' 하고 이렇게 민감하게 생각을 해서 긍정적인 면을 또 본 것입니다. 이런 것이 신앙의 소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곧 계시하신 바를 해석해 나아갈 때 우리는 그것의 부정적인 듯한, 딱딱한 듯한, 냉혹한 듯한, 또 편협한 듯한 표면과 이러한 속에 둘러싸인 데서 하나님의 그 관대하고 자비롭고 보편적인 - 전세계, 전우주, 전역사 위에 뻗치는 은혜를 비로소 찾아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구원받는 신앙이 가지고 있는 특성들입니다. 그런고로 구원받는 신앙의 지적 요소는 신앙의 대상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꼭 필요한 양의 이해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그 구원의 대상에 대한 이해가 바를 뿐 아니라 풍부해져야 합니다." "신앙이 자꾸 높아지기 위해서는 그때의 정도에서 정지하고 있어서는 안 되고 신앙의 대상에 대한 이해가 더 풍성해지고 더 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이해가 더 풍성해지고 더 깊어져서, 부정적인 듯한, 딱딱한 듯한, 냉혹한 듯한, 또 편협한 듯한 표면과 이러한 속에 둘러싸인 데서 하나님의 그 관대하고 자비롭고 보편적인 - 전세계, 전우주, 전역사 위에 뻗치는 은혜를 찾아내도록 성신께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부를 수 없는 여인의 위치 <신앙의 자태2>, 제4강 수로보니게 여인의 신앙 중 148쪽.
"예수님께 자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각 사람은 자기가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 앞에 예수님의 자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떤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까? 내가 의로운 자리에 서 있어 가지고 "예수님, 나는 의롭습니다. 그러니 자녀로 인정해 주십시오" 하면 됩니까? 어떠한 의로운 자도 예수님께서 자녀로 취하지 않으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녀로 취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제1단계는 자기가 죄인임을 자각하고 죄인의 위치에 서서 예수님 앞에 부르짖고 기대해야 합니다. 즉 구원을 받기 위해서, 새로운 생명을 받기 위해서 그가 서 있어야 할 자리는 죄인의 자리입니다." "그러한 물질적인 행복을 요구하는 위치는 그릇된 생각의 소치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한 마디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셨다는 것은 '너는 유대인이 아니다' 하는 간단한 의미가 아니라, '네가 당연히 들어와야 할 하나님의 오이코노미아(경륜) 가운데 들어와 있지도 아니하면서 하나님의 오이코노미아 안에서만 가질 수 있는 관계를 네가 가졌다고 생각하니 그것은 부정당하다' 한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부를 수 있는 관계는 "그분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우리가 모실 분이요 우리는 그분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 즉 이코노미(economy)의 내용을 자기 스스로 인정하는 관계입니다. 그런 위치에 들어와 있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부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의 통치를 받는 그런 위치에 있도록 성신께서 가르쳐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자신의 위치에 대한 여인의 각성 <신앙의 자태2>, 제4강 수로보니게 여인의 신앙 중 150쪽.
"그러한 빈곤한 증거 가운데서도 그 여인은 민감한 통찰력을 가지고 삽시간에 그런 훌륭한 신앙에 도달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과의 대화 몇 마디 가운데서 마땅히 깨달을 것을 환연히(의혹이 풀리어 감쪽같이)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이 훌륭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대화에 접촉했을 때 척하니 깨달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말로 부끄러운 일이 많습니다. 왜? 우리는 성경이라는 충분한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밤낮 이야기를 들어도 멍텅구리 같은 생각만 하고 앉았고 완고하고 자기 고집을 못 버리는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동물 개와 집주인의 아이들을 이렇게 딱 구분해서 이야기를 해주실 때 그 여자는 자기 위치를 개의 위치에다 놓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개이지만 얻어먹을 수는 있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자기를 겸손한 위치, 마땅히 두어야 할 자리에다 둘 때 예수님의 말씀은 냉혹한 듯할지라도 냉혹한 것만이 아니라 반성을 시키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자 할 때 자기 스스로를 높은 위치에다 놓고 "자, 이만큼 높으니까 사랑해 주십시오"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면 낮출수록 즉 "하나님이여, 나는 감히 하나님을 우러러 볼 수 없나이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 거기에 사랑이 오는 것입니다. 아마 사랑이라는 것은 거리가 가깝기보다는 멀수록 좋은 모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리가 멀수록 곧 "나는 이렇게 낮습니다" 할 때 참으로 거룩되이 임하는 것입니다."
성경이라는 충분한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밤낮 이야기를 들어도 멍텅구리 같은 생각만 하고 앉았고 완고하고 자기 고집을 못 버리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용서하시고, 자기를 겸손한 위치, 마땅히 두어야 할 자리에다 두게 하사, 예수님의 말씀이 냉혹한 듯할지라도 냉혹한 것만이 아니라 반성을 시키는 말씀인 것을 바로 깨달아, 하나님의 사랑을 거룩되이 입도록 성신께서 가르쳐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신앙의 대상에 대한 인식이 갈수록 바르게 형성되어 감 <신앙의 자태2>, 제4강 수로보니게 여인의 신앙 중 154쪽.
"자기가 개의 위치에 설 때에 이 분은 어디에 서시느냐 하면 높은 위치에 서시는 것입니다. 자녀일 때는 가까운 위치에 서 계시지만 개일 때에는 훨씬 높은 위치, 우러러보기에는 너무나 높은 위치에 서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천하 만민이 다 개라고 할지라도 개를 다 돌아보시는 높은 위치에 계신 그분을 내가 또한 찾지 않을 수 없다. 그분의 자비와 은혜를 내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면 신앙의 대상에 대한 그의 생각이 삽시간에 변화한 것을 뜻합니다. 즉 '그 신앙의 대상은 인격자시다. 그분은 높은신 분이다. 높으실지라도 자비하신 분이고, 높으실지라도 필요한 것을 내려 주시는 분,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다' 하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요컨대, 이렇게 필요한 것을 내려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러면 이 경우에도 필요한 것을 내려 주실 것이 아니냐? 내가 그대로 갈 수 있느냐?' 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신앙입니다. '필요한 것을 내려 주시는 주님이다. 나는 지금 그분이 필요하지 않느냐? 그분이 이런 것을 외면하시겠느냐? 외면 아니하신다' 이런 신앙을 가지고 나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겸손한 위치, 즉 신앙의 대상에 대해 시간이 갈수록 바르게 인식해 가는 위치, 이것은 참으로 신앙의 위대성을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올시다."
높으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갈수록 바르게 형성되게 하시고, 높으실지라도 필요한 것을 내려 주시는 분,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으로 알고 늘 주를 의지하고, 주께서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주께서 이끄시어 깨닫도록 하심 <신앙의 자태2>, 제4강 수로보니게 여인의 신앙 중 156쪽.
"그러나 이런 아이디어는 예수님이 주신 것입니다. "생각을 그렇게 해라"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야, 네가 네 자신을 생각할 때 나를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부를 수 있는 한 가정 안에서의 관계를 가진 사람으로 생각지 말아라. 왜냐하면 너는 그런 과정을 안 겪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는 상 밑에 있는 개의 위치에다 너를 놓고 생각해 보아라. 그렇게 하더라도 너하고 나하고는 관계가 있을 수 있지 않느냐?" 하신 것입니다. "아,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 관계라도 족합니다. 그 관계라도 넉넉하지 않습니까?" "그래, 그것으로라도 넉넉히 주겠다." 이것이 얼마나 훌륭한 신앙인지 모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하시는 그 간단간단한 말씀에서 훌륭한 교훈을 그리고 담담히 순순히 타이르시는 말씀의 교훈을 딱 받은 것입니다. 받고 거기에 매달린 것입니다. 이렇게 할 줄 아는 것이 위대한 신앙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훌륭한 신앙입니까? 그 여인은 예수님의 냉혹한 듯한 말씀에서 사실상 예수님이 온온 순순히 자세하게 다정하게 가르쳐 주시는 관계를 발견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그 많은 말씀 가운데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풍성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와 나의 관계를, 그가 나에 대해서 무엇을 하시려는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개별적인 세세한 문제에서 그것을 이루어 주신다는 신앙을 안 가지고서는 그것 하나하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들이 그냥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별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내 신앙 때문에, 내 신앙을 통해서 주신 은혜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내 신앙을 통해서 꼭 주시려고 하실 때는 우리는 이루어 주시려는 의사를 간취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 하나님이 그럴 때는 주시려고 하신 것이다. 여기까지 이렇게 인도하셨으니까 앞으로도 인도하실 것이다' 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많은 말씀 가운데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풍성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와 나의 관계를, 그가 나에 대해서 무엇을 하시려는가를 발견하게 하시고, 어떤 개별적인 세세한 문제에서 그것을 이루어 주신다는 신앙을 가지도록 성신께서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 <신앙의 자태2>, 제4강 수로보니게 여인의 신앙 중 158쪽.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주께서 기이히 여기시고 네 믿음이 크도다 하고 말씀하신 수로보니게 여인의 신앙은 오늘날 저희들이 본받을 만한 훌륭한 신앙인 줄 아나이다. 주여, 저희들도 이런 큰 믿음을 가지기를 원하오며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을 더 많이 풍성히 알아야 하겠사옵고 어떤 문제가 제시되었을 때 그 문제에 있어서 우리 주님과의 관계를 더 깊이 가져야 하며 주님이 그 문제에 대해서 나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가를 주의 풍성한 여러 말씀들 가운데에서 더 민감하게 느끼고 깨닫고 배울 줄 알아야 하겠사옵나이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주께서 나에게 주님과 나와의 어떤 특별한 관계 위에서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해석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실 때 그것을 잘 배워야 하겠사오며, 그것을 배우면서 주께서 인도하시는 그 손을 보고, 그 앞 길로 더욱 계속해서 인도하실 것을 또한 믿고 의지하며, 소망을 가지고 주님 앞에 간곡하게 전적으로 맡기고 붙들고 매달려야 하겠사옵나이다. 주여, 이와 같은 깊은 신앙을 저희들에게 내려 주시고 더 풍성케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968.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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