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강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4)

"그는 역사 위에서 다만 감독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친히 운전하시는 하나님으로서 - 또 무엇보다도 거룩한 속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 그의 속성의 면면을 역사 위에, 현실 생활 가운데 보이십니다." "그의 거룩하신 존재에 대한 의식은 우리의 지적인 사고나 추리에 의해서 얻어지는 결론으로 터득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 위에서 당신 자신의 의사 혹은 의지(will power)를 구체적으로 현시(顯示)해 나가시므로 그것이 나에게 하나의 실증의 사실로 접촉할 때 내가 깨닫는 것입니다." 오늘 일상 속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실증에 접촉하고 그 경륜을 배워가길 기도합니다.

"반드시 정상적으로 영혼의 기능이 작용할 때 하나님께 대한 인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상적인 영혼의 기능이 작용하는 위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가 역사 위에 나타날 때 그것이 역사적인 큰 사실로 내게 인식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가 역사 위에 나타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역사 위에서 무엇을 하시고자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나라를 일으키시고자 하시면 일으키시고, 어떤 나라를 망하게 하시고자 하시면 쳐 멸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개인의 생활 경험 가운데서 하나님을 어떻게 알게 되느냐 할 때, 구약에서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 특별히 우리에게 보이신 중요한 하나의 방도는, 사람이 위기(crisis, 分岐點)에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분기점, 곧 환란이 있을 때 알게 하십니다. "환란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 : 15). 이렇게 환란이 있을 때는 부르짖게 하셨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존재하신다는 것을 생생하게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증(argument)으로는 이것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의지가 인류의 역사 위에 구체적으로 작용할 때 사람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파악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파악한 것에 의해서, 즉 새로운 판단 기준(criteria)에 의해서 자기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이나 사관(史觀)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정상적인 영혼의 기능으로 일상 속에서, 특히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바를 바로 인식하고 인생관과 세계관을 바로 세워나가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쉐키나 구름을 이렇게 생생하게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은, 당연히 그로 말미암아서 신 개념이 풍요해지고 장성했어야 하는데 참으로 그랬는가? 그 장성의 여부는 그 후의 생활과 역사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은 그 뒤 항상 형식화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인데, 마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교를 형식화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즉 그리스도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을, 항상 무엇인가를 형성해 나가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무엇인가를 형성해 나가는 것으로(종교적인 게시글을 올렸다는 것으로) 종교성을 채우지 말고, 늘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날마다 배우고 터득하도록 성신께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길 기도합니다.

"40년 동안 방황하면서 이들은 하나님 손 아래에서 움직이는 도구로서 무엇에 기여하고 있었느냐 하면, 비록 그것이 자기네가 목적 의식을 가지고 한 일은 아닐지라도 우선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러면 자기네가 거기서 자식들을 낳는다는 사실은 단순히 그냥 낳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산업을 계승해서 하나님이 내신 거룩한 사명이 땅 위의 역사 위에서 끊임없이 전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부와, 내리신 바 사명의 열매를 이스라엘의 제 1대에게서는 거두지 못했지만 제 2대부터는 거두게 만드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명은 그때의 한 시기의 사명이 아니고 역사와 더불어 유구하게 흘러가야 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의 혼인에 관한 부분(제 24장)에서 "이 혼인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자녀로써 교회를 증가시키는 것"이라고 쓴 것을 아실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유구하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나가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가르치시고, 이를 깨닫도록 이끄시옵길 기도합니다.

"광야에서 자라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자식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이 독특한 생활 제도와, 또한 죄 있는 인생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가는 방법과,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를 어떻게 유지하고 살아가는 것인가를 늘 배웠습니다. 그리고 현저하게는 성막의 지성소 위에 올라가 있는 쉐키나 구름의 인도를 받아 자기의 인생 길을 늘 걷는다는 큰 실물 교훈을 늘 받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큰 강령을 가르쳤는데, 먼저 사람은 하나님을 모시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즉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거룩한 법칙과, 둘째로 사람끼리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사회법을 가르쳤습니다."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으로 늘 인생 길을 걷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그 자녀들은 이러한 것들을 배우면서 자라났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애굽 노예 생활을 하지 않았고, 애굽적 종교의 그 악질적인 영향을 대체로 받지 않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애굽적인 여운은 아직 남아있었으니, 그것은 애굽에서 나온 자기들의 부형들이 끼친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악영향을 받기 쉬운데, 늘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으로 감화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떤 다른 음식을 맛보았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배가 부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배고프지 않도록 먹여 주시니까 타박을 할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배가 고파서 눈이 쑥 들어갔다면 타박할 여유도 없이 허겁지겁 다 먹었을 것입니다." 배가 불러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길 기도합니다.

"첫째는 그 사람들이 길 때문에 마음이 시들해지고 곤비해져서 원망을 했다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원망에 곁들여 이 박한 식물밖에 없다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배가 불렀었다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들 중에는 애굽적인 요소가 아직도 완전히 제거되지 아니했다 하는 애기입니다." "거룩한 아버지시여, 오늘날 우리들은 과거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가졌던 그 신앙을 가지기 쉽고, 또 이것을 각성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왜 역사 위에 세우시고 보존하시고, 어디로 끌고 가시며, 무슨 목표와 사명을 주셨는가에 대해 아무런 자각이 없이 '그저 사람은 이렇게 사는 것이다.' 하는 식으로 - 광야 40년의 생활 방식대로 - 사는 모양을 그대로 반복하기가 쉽사옵니다. 이런 일을 주께서 깊이 반성케 하시고 회개케 하시옵소서."(188쪽 기도 중)

"이 백성들이 가라 하는 데로 가서 뭘 해야 하겠는가 하면, 가서 점령해야 합니다. 점령하면 뭘 하겠는가? 거기에 이미 있던 가나안 족속들의 문화, 특히 헷(Hittites) 제국의 거대한 이교적인 문화, 악질적이면서도 강력한 색채를 가지고 있는 그 문화를 쳐부수어야 합니다." "그것을 쳐부수어 파괴할 뿐만 아니라 그 위에 다시 새로운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에코노미(경륜)의 내용을 세워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의미에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사실에 대한 바른 지적 요소를 가진 신앙입니다." 주께서 허락하신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에코노미의 내용을 세워나가게 성신께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길 기도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저 사람들에게 꼭 있어야 할 것으로 강하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제 1 대도 그것이 없어서 실패하고 넘어지고만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능히 들어가 정복하고, 능히 하나님의 거룩한 에코노미를 세워 나갈, 그러한 역사를 전개시킬 신앙이었습니다. 그런 확실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그 능력을 자기가 힘입고 나가는 신앙이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도가 되는, 은혜를 내려 주시는 파이프와 같은 그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랬는가? 첫째, 그 사람들은 은혜의 방도의 중요한 요소인 인식론이 부족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신앙의 지적 요소가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어디로 가는 것이냐에 대한 명확한 의식이 중요한 이데올로기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은혜의 수단과 방법과 매체인 믿음의 지적 요소를 늘 가르치시고, 일상 속에서 깨닫도록 인도하시길 기도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 땅 위에 교회라는 한 사회 형태를 만드시어 그것을 중심으로 어떤 생활을 하도록 하셨는가에 대한 각성이 빈약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때의 이스라엘적인 교회, 곧 구약 교회가 거룩하게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명확한 각성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있어야만 신앙이 생길 터인데 그것이 없었습니다. 신앙은 덮어 놓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믿음을 줍소서. 믿음을 줍소서."하고 밤새도록 기도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고 했습니다. 말씀이 들어가지 않고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그 계획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서고 거기에 대한 자기의 기대가 생길 때 비로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 이것은 과연 그렇다!'고 할 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 이렇게 되어야만 하겠다. 나는 이것을 원한다.'고 할 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원하지도 않는다면 믿음은 소용 없습니다. 어디에 들어가길 원하지 않는데 믿는다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항상 "바라는 것의 실상"으로서의 믿음입니다(히 11:1). 무엇을 바라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허락하신 땅에 들어가서 우리는 나라를 건설해야겠다. 우리는 거기에 있는 기성의 문화를 파괴하고 새로운 문화를 건설해야겠다."고 하면서 그것을 바랐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할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까 해 주신다." 하고 이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바램과 믿음이 약했습니다. 거의 믿음의 자취가 안보였습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인 까닭에 하나님께서 하시되 우리의 몸뚱이를 쓰시고 우리의 생각을 쓰시고 우리의 인격적인 활동을 쓰셔서 하실 것이다.'는 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빈약했습니다. 적어도, 그들의 좁은 민족 이상이 아닌, 거룩한 구약의 경륜으로서의 호방한 이상이 없었습니다." 주의 말씀으로 늘 바른 인식을 하도록 가르치시고 바라게 하시고 믿게 하사 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일에 충성하도록 하시길 기도합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성격이 불확실한 것은, 교회의 거룩성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없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시기로 약속하셨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다. 우리에게 계시하셨다.' 하는 확증과 그 확증을 가질만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네가 다 활동을 잘해서 사는 줄 알며, 자기네가 부지런히 장사하고 일하니까 나는 잘 먹고 잘 산다고 착각하고, 하나님께서 무슨 목적을 이루시려고 자기들을 기르시고 보존하시며 나가시는가를 생각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여기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으니 밤낮 눈 앞의 현실 문제만 가지고 따지는 것입니다." 제가 다 활동을 잘해서 사는 줄로 착각하지 않게 하시고, 밤낮 눈 앞의 현실 문제에만 매몰되지 않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실증하며 살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불뱀에 물려서 다 죽게 된 그들이 살려면 믿어야 했습니다. "믿음으로 살든지 못 믿겠으면 그 자리에서 죽든지 해라. 더 이상 데리고 가야 소용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결정적인 한 분기점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 믿는 것은 가장 쉬운 조건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가장 쉬운 조건 하나뿐입니다. 뭘 하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를 다 내 버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술 먹고 담배 피우는데 그것을 끊고 예배당 나오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를 먼저 믿으시오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믿으시오." "예수님이 누구요?"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돌아가시고 당신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구주시오. 그 구주를, 당신은 마음 가운데, '아, 나는 믿습니다'하고 마음으로 매달리시오. 그러면 되는 거요." - 그런데 그것을 못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고개 한번 돌려 쳐다 보라는 것인데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매달리면 죄를 사하여 주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새롭게 창조해 주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주시는 은혜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하나님 말씀에 의거하여 믿음으로 늘 받아 그 힘으로 생활하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전도(傳道)를 하되 똑똑하게 그렇게 해야 합니다. "너희들 불뱀 쳐다보아라. 그러면 산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것입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점은 구리뱀을 쳐다본다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는다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일상을 살아가게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길 기도합니다.

"들렸다는 그 점에서는 같은 것이지만, 그 광야의 구리뱀은 나다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 민수기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는 거기에서 복음을 바라 보라는 것도 아니고, 십자가를 바라 보라는 것도 아니며, 예수님을 바라 보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약속하셨다. 실지로 쉬운 약속이다. 가장 쉬운 분부다. 그렇게 해라. 그러면 산다." 그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이 본질적으로 부패해 있기 때문에 항상 환란을 겪고 고통 가운데 빠져 들어가서야 비로소 신앙을 가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늘 귀기울이고, 쉬운 분부부터 일상 속에서 순종하는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가르치시고 붙드시며 인도하시길 기도합니다.

"독이 들어가 혈관에 차츰차츰 돌기 시작하면 비로소 그 물린 증상이 나타나 부어 오릅니다. 이것은 죄와 꼭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의 위치를 바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데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를 반성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만일 교우 여러분들이 각각 '내가 믿음을 더 얻어야 하겠다.'고 한다면, '자, 나는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죄의 본성이 늘 틈을 타 독사처럼 물려고 하며, 물리기도 하는 현실을 늘 반성하고, 오직 주만 믿고 의지하도록 성신께서 일상 속에서 가르치시며 인도하시길 기도합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그 말입니다. 이것은 직접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전해 주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아픈 것을 조금 덜어주는 진통제가 된다는 정도의 소식이어서는 안됩니다. 아픈 것과 이 현재의 불구(不具)의 현상이라는 것이 완전히 소멸되어 버린다는 소식이라야 합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다른 사람이 쳐다보든지 말든지 나는 쳐다봐야겠다.'고 해야 합니다. 항상 그것을 나에게 적용하여야 하지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인정만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이 신앙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 지적 요소이긴 하나, 그것으로 끝나고 만다면 역사 신앙(historical faith)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명해 주시는 분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하고 온전하게 분명히 들으며, 말씀에 근거하여 일상 속에서 주를 의지하고 믿도록 붙들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바라보면 내가 살겠다고 하는, 의지하는 심정이 생겨야 합니다. 바라보라니까 그저 한번 바라보자 하는 것도 안되고, 바라보면 될까 하는 것도 안됩니다. '바라보면 내가 살겠다.'고 하는 바로 그것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죽을 수밖에 없기에, "바라보면 살리라." 하는 하나님 말씀을 의지해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라보면 살리라." 하는 그 말씀 때문에 바라보는 것이지 그 말씀을 신용하지 않고 바라볼 때는 우연히 보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늘 배우고, 그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일상을 살아가도록 붙드시고 인도하시길 기도합니다.

"어쨌든지 바라 보면 낫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으로 즐겨서 바라 보았든지, 처음에는 버티다가 나중에는 할 수 없으니까 '에이, 바라 보아야겠다.' 하고 뒤늦게 깨달아 바라보았든지, 그럴리가 없다고 도무지 안 믿다가 정 죽게 생겼으니까 '죽느니 한번 바라보기나 하자.' 하고 바라보았든지, 좌우간 바라본 자는 다 낫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라다 본 이 사실에 지정의(知情意)적인 세 요소가 다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에게 새로운 영원한 생명을 갖다 준 것은 아닙니다." "바라보는 그 때의 태도에 따라서 좀더 많은 신앙, 좀더 희박한 신앙, 그렇지 않으면 희한한 경이감, 이런 것을 얻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꺼이 즐겨 의지하고 순종하여 좀더 많은 신앙을 얻도록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길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불뱀에게 물려서 장대의 구리뱀을 바라 보았을 때 그 신앙 태도의 여러가지 모양이 각각 어떠한 출발을 하게 되었는지를 우리로 깊이 생각하게 하시고, 이 문제에 대한 거룩한 계시를 저희에게 더욱 풍성히 내리셔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명확하고 새로운 각성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신앙의 자태에 관해서도 좀더 풍요한 재료를 얻게 하여 주시고 우리 자신을 바른 터 위에 서서 관찰하며 평가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아버지시여, 저희들 각 사람을 다 주장하셔서 참되고 깊은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게 하시고, 저희 교회에 주께서 은혜를 베푸사 거룩한 사명을 각성하게 하신 이 큰 사실을 늘 명심하고, 거룩한 사명을 받은 자다운 고귀한 위치에 늘 있게하여 주시며,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광야에서 넘어져 버리는 저회적(低徊的)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행한 생활을 하지 않게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저희 교회를 주께서 세우사, 주의 영광을 위하여 큰 사명을 깨닫게 하셔서 이 시대와 역사를 향해서 끊임없이 전투하며 끊임없이 전진케 합소서. 우리에게 이 거룩한 부르심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한 각성이 없이 허다히 많은 세상 사람들과 많은 저회적인 신자들의 생활과 같은 태도를 그대로 취하고 나가는 어리석음을 가지지 않도록, 이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깊이 깨닫고 각성하는 바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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