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강 바울의 비시디아 안디옥 설교(2)
“왜 이런 서술법을 쓰는 것입니까?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갔다’ 하고 말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가게 하셨다’ 하는 것은 무엇이 다릅니까? 행동에서나 현상에서나 역사를 만들어 내는 데에서는 같을 테지만,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다른 것이고 또 일의 해석이 다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갔다’ 할 때는 ‘그는 경건한 사람이고, 그는 신과 통한 사람이고, 그래서 그는 계시를 받고 참으로 용단 있게 용기 있게 위대한 족장답게 민족을 창시했다’ 하는 말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내보내셨다’ 할 때는 ‘하나님의 계획과 경영은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다’ 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류 역사 위에서 어떻게 역사하셔서 무엇을 어떻게 창조하시고 무엇을 어떻게 이루어 나가시느냐’ 하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정치(government) 혹은 하나님의 정사(政事)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것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인류 역사 위에서 어떻게 역사하셔서 무엇을 어떻게 창조하시고 무엇을 어떻게 이루어 나가시는지 배우고 깨닫고 늘 그러한 관점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게 하옵소서.
“이스라엘 민족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도구를 어떻게 쓰셨느냐’ 하는 것과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려고 인류의 역사 위에 이스라엘 백성을 택해 내신 줄 아느냐’ 하는 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요컨대 여기에 나타난 사관(史觀)은 ‘모든 역사의 큰 주역 혹은 유일의 주역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시다’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이 여기서 한 이 강설은 간단한 강설 같지만, 이후에 올 기독교의 거대한 역사를 올바로 계속 해석하도록 하나의 중요한 시사(示唆)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이끄시는 삶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있게 하옵소서.
“역사에서 간단한 이야기를 재료로 취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진행을 말할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 공의를 나타내시고 어떻게 그 사랑을 나타내시는가, 한마디로 하나님의 만세 전의 경영과 도략은 그 공의와 사랑을 어떻게 적극적으로 반영해 나가는가 하는 것에 대해 다윗까지 이스라엘의 맨 처음 역사로써 몇 가지 중요한 예시(例示)를 한다’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까? (중략) ‘결국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와 사랑의 역사(歷史)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정점을 땅 위에 인류의 역사 위에 계시했다’ 하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생각하고 생활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거기에 직접적인 직설법을 쓰지 않고 결국 자꾸 생각해 나가면 그 결론으로서 ‘아, 그러면 그것 자체도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도략 가운데 된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대권을 가지고 이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사람의 죄는 사람의 죄로서 책임을 져야 하지만, 너희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한들 그렇다고 해서 너희가 하나님의 일을 실패하게 했다든지 차단했다든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의 절대의 대권과 그 대권의 행사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몇 배가 되는 모든 악한 자들이 일어나서 모든 악을 다 행할지라도 그것을 저해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도략, 하나님의 절대의 대권과 그 대권의 행사로 이끌어 나가심을 믿고 의지하며 날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아가게 하옵소서.
“위대한 개혁주의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강조했습니다. 물론 칼빈 선생은 어거스틴을 권위자로 인용해서 때때로 그것을 강조해 나갔습니다.” “‘속죄가 절대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까지 이야기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방법이었느냐 아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냐’ 할 때 어거스틴 선생이나 아타나시우스 선생이나 칼빈 선생은 ‘그렇게 이야기할 수 없다. 하나님의 전능과 대권하에서 속죄를 꼭 절대적이라고 할 것이 있느냐? 하나님이 그렇게 예수님을 육신의 몸으로 땅에 보내서 사람을 구원하시지 않으면 도무지 구원하실 수가 없었다는 그런 말로 하나님의 대권을 제한하는 태도는 좋지 않다. 그런고로 그렇게 절대적으로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늘 중요하게 생각하게 하옵소서.
“논란을 한 결과, ‘하나님이 이미 계시하신 사실에 대해서는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하나님께서 그 일밖에는 절대로 하실 수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에서는 안 되겠지만, 하나님께서 그 길 외에 다른 길을 취하시기를 원치 않으셨다면 그것이 또한 하나님의 의사(意思)인 까닭에 절대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당하다’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 하시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개혁 신학자의 이론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계시하신 사실에 대해서는 그렇게 받아들이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그 길 외에 다른 길을 취하시기를 원치 않으셨다면 그것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제가 여러분께 증언 하고 싶은 것은 제 자신이 믿는 바는 무엇인가 할 때 ‘하나님은 절대자이신 까닭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사를 보이신 것은 완전한 의사이다. 하나님의 절대 속성하에서 나타내신 거룩한 의사는 그것도 완전하고 절대적인 까닭에 하나님의 무한한 절대에 대해서 우리의 추리(reason)가 함부로 상고(詳考)하지 못하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 다른 길이 있다든지 없다든지 하고 자꾸 이야기 할 것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길을 보이셨고, 하나님이 보셨으면 그것은 절대이다. 그런 줄 알고 우리가 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꾸 논리로써 이것이 절대적이라면 다른 상대적인 길이 없다는 말이 아닌가, 그 길밖에 없다는 말이 되고 말지 않은가, 하고 생각할 일이 아니다. 그 길밖에 없다고 보셨으면 그 길밖에 없다고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하나님이 그 길을 가지고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뜻이다. 하나님이 쓰시려면 쓰시는 것이고 쓰시지 않으려면 안 쓰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지 않는가. 그러니 하나님의 거룩한 의사 표시는 그 자체로 언제든지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속성하에서 나타내신 거룩한 의사는 그것도 완전하고 절대적인 까닭에 하나님의 무한한 절대에 대해서 함부로 추리하고 상고(詳考)하지 않게 하시며,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게 하옵소서.
“잘못해서 하나님의 대권을 제한하는 것도 옳지 않고, 잘못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그 무한한 값을 제한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어느 편이나 다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타내 보이시는 거룩한 의사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것은 우리가 인간의 논리(reason)의 형식의 범주 안에서 하는 이야기이니까 논리의 형식의 범주 안에서 상고 할 수 있는 그것만 생각해야지, 그 이상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는 것을 자꾸 이야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둘째로, 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가설을 자꾸 꺼내서 한쪽을 자꾸 약화시키는 것은 부정당한 일입니다.” 논리의 형식의 범주 안에서 상고 할 수 있는 그것만 생각하게 하옵소서.
“이 설교는 어디에 늘 중점을 두고 이야기 했는가 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의 중심이시고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하나님이 전부이시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하셨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다. 너희가 이렇게 하고 인류가 이렇게 해서 역사가 이렇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의미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다는 것은 천계(天界)에서 하신다는 이야기 일뿐만 아니라 땅 위에서 인류의 역사 위해서 이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거기에 무엇이 분명히 나타났는가 할 때 ‘하나님 한 분이 주역이시다’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주역이신데 하나님의 통치의 대권은 역사 위에 이렇게 분명하고 명료하게 나타나 있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중심이시고 하나님의 통치의 대권이 역사 위에 분명하고 명료하게 나타남을 믿고 깨닫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통치 대권이 인류의 역사 위에 나타날 때 그것은 그 전에도 늘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권능의 왕국이 인류의 역사(歷史) 위에서 역사(役事) 하는 것입니다. (중략) 인류의 역사 위에서 작용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중략) 하나님의 권능의 왕국이 인류의 역사(human history 혹은 the history of mankind)에서 워크 아웃(work out) 한다. 로트(wrought) 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왕국이 인류의 역사(歷史) 위에서 역사(役事) 하는 것을 잘 깨닫게 하옵소서.
“칭의(justification)는 앞에서 말씀드린 중생이라든지 변개라든지 성화와는 아주 다릅니다. 중생이나 변개나 성화는 항상 그 사람, 곧 죄인의 내부에 발생하는 이야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은 그의 내부에 발생한 문제라기보다는 그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도덕적인 문제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법적인 지위를 규정하는 말입니다.” 의롭다고 선언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하나님이 친히 대가를 지불하게 마련하시고 그 마련하신 것에 의해서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과거의 죄와 오늘의 죄뿐 아니라 나의 모든 결핍으로 말미암은 미래의 죄까지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의 터 위에서만 칭의라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너, 오늘날까지의 죄만은 용서해 주마. 앞으로의 죄는 네가 주의해라. 주의하지 않으면 너는 탈락한다’ 하는 것은 아르미니안(Arminian)들이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저의 모든 결핍으로 말미암은 미래의 죄까지 용서하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칭의의 실효(實效)가 어떻게 미치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참으로 일생 입고 싶은 깨끗하고 아름답고 좋은 옷을 입었다면, 그 옷을 입은 것 때문에라도 다시 더러운 데 가서 더러운 것을 묻히고 아무렇게나 주저앉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용서의 철저함을 깨달아서 칭의라는 사실이 나의 내부에 현실적으로 실효 있게 유지되었을 때는 절대로 죄에 더 거하지 않으려는 강한 반발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용서의 철저함을 깨달아서 칭의라는 사실이 저의 내부에 현실적으로 실효 있게 유지되게 하옵소서.
“자기 생활의 고귀성과 남이 존경하는 것의 가치를 알았을 때는 다시 그런 데로 빠져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칭의의 실질적 효과입니다.” 제 자신의 생활의 고귀성과 남이 존경하는 것의 가치를 알게 하옵소서.
“신약에 있는 이 중요한 사상이 무엇을 가르치는가 할 때, 먼저 그 근거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서 그를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셨다는 사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그 생명으로 그를 다시 낳으신 까닭에, 부활하신 그 생명으로 태어난 그에게 이번에는 하나님이 무슨 법적인 지위를 주셨는가 하면 ‘내 자녀이다’ 하시는 것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後嗣), 곧 하나님의 후사”(롬 8:17)가 되어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좋은 것을 받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하는 말씀과 같이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높은 위치에 두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서 저를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시고, 자녀 삼으시고,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높은 위치에 두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자식이 하나님의 자식답게 진리를 사모하고 살고 하나님의 자식다운 거룩한 영광을 나타내고 살려고 할 때 세상 사람은 그것을 칭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저해하고 무시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자식으로서의 권위를 행사하고 나갈 때 그들이 그것을 저항하고 무시할 때는 곧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께 저항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식답게 진리를 사모하고 살고 하나님의 자식다운 거룩한 영광을 나타내고 살게 하옵소서.
“저희도 다 양자의 영을 받아 후사로서 그 찬란한 영광에 들어갈 것을 믿고 감사하옵나이다. 이 같은 사실을 확실히 알고 믿어서 이 세상 사는 동안 허투루 살지 않고 참된 하나님의 자녀로 힘 있게 능력을 발휘하며 살게 하여 주셔서, 저희를 자녀로 세우신 본의가 있게 살게 하옵소서.” 1966년 4월 6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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